포은 정몽주 묘소 전경
모현면 능원리에 모셔진 문충공파(포은공파) 파조이신 정몽주 조상묘소에 참배하러 갔다왔네요.
나라정 (鄭)이 性이고 본을 연일 (迎日)을 쓰는, 연일정씨는 시조가 다른 세개파가
있는데 지주사공파와 감무공파,양숙공파가있는데 지주사공파외엔 아는것은 없다.
연일정씨는 지주사공파에서 갈라진 포은공파(문충공파(文忠公派)의 파조가 정몽주선생인데
문충이란 정몽주의 시호로 후손들이 시호를 따 문춘공파로 대대로 이어져오고있으니
연일 鄭, 영일 鄭, 오천 鄭은 모두 같은말로 같은 집안이란이야기가 됩니다.
지주사공파에는 포은공파(문충공파), 생원공파,문계공파,문손공파,사정공파,정량공파,만호공파,
도사공파, 총8개의 세파가 있는데 이중 포은 정몽주의 후손인 포은공파를 문충공파라고도하는데
여기서도 포은공파의 세파들이 엄청 많이 있어 약 40여개가 넘는걸로 알고있음.
연일항렬에서도 지주사공파(형양공파) 포은공파32대 항렬로 끝이름을 교(敎)자로 돌림되어
사촌(四寸)이든,육촌(六寸)이든, 팔촌(八寸)이든 항렬자를 씀으로서 형제관계를 표시하고 있답니다.
초면 동성동본이면 서로 항렬을 비교하여 할아버지뻘인지 형제뻘인지 금방 알수있는데
항렬은 아무나 맘대로 정하는게 아니고 문중에서 족보를 편찬할때 일정한 대수끼리의
항렬자와 그 용법을 미리 정해놓아 후손들이 이에 따르도록 하는것이 관례로 되어 있어요.
각설하고 초중고시절에 어르신들이 제사때 마다 여말삼은(麗末三隱) 또는 고려삼은
포은(圃隱)정몽주, 목은(牧隱)이색, 야은(冶隱)길재를 두고 고려의 세충신을 이라고
두고 두고 이야기를 하였고, 큰 아버님께서 야은 대신 도은 이승인이라고 얘기가 있어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이 나네요.
집성촌으로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평택 오성면 양교리,경북 김천시 봉산면 예지동,
의성군 안계면 봉양동, 등이 있다.
친명파의 거두이며 대학자로 덕망이 한시대를
뒤덮는 인재인 포은 정몽주선생의 표지석
포은 정몽주선생의 신도비
날씨가 제법 차서 그런지 사람이 없다.
우측에 있는 연안 이씨 행적비
커다란 홍살문이 탐방객을 맞이하네요.
멀리 산언덕에 정몽주 묘가 있는데 풍수가
좋다고 하여 풍수학자들이 많이들 찾는다고
하는데 명당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고 하네요..
정몽주는 고려말 24세 되던해에 과거에서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삼장에
잇달아 모두 장원급제로 합격하면서 벼슬길에
오른 학자이며 충신이며 성리학이 뛰어나셨다.
모현당
영모재는 재실외에도 후손들에게
충과 효를 알리고 교육할수 있는
학습장의 역할과 안내도 합니다.
영모재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단심가
이詩는 정몽주가 이성계가 낙상하여 병환중에 있어
문병을 가게 되었는데 문병을 마치고 이방원과
대좌하게 되어 고려조의 정치이야기중에 정몽주를
떠보기 위해, 시조 한 수를 뽑는데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후세에 널리 회자되었던 이방원의 만수산 (萬壽山)
"하여가" 노래였는데 화답하는 것이 인사라고 해서
단심가 시조 한수 읊었는데 이것으로 두사람간의
뜻을 알고 헤어지고 얼마뒤 만수산의 산그림자가
드리워져갈때 말을타고 주막을 벗어나 선죽교
돌다리를 향해가는데 이방원의판위위시사(判衛尉恃事)
조영규가 가로막아 철편을 세번이나 휘둘러 절명하고
말았다.만고의 충신 정몽주는 이렇게 선죽교 다리위에서
순절하였는데 이때나이 66세였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어머니가 지은 백로가 시비
묘역 입구에 자리한 제실 건물입니다.
증손녀 사위 자헌 이석형의 묘소를
아래서 역광으로 찍어보았네요
풍수지리는 잘모르지만 탁트인 전망으로
가슴이 뚫리네요.....
포은 정몽주 묘에는 문인석,장명등 석등,석물이
많이 배치되어있고 묘역 좌우로 자손들의 묘가
20여곳이 있어서 두루 살필수 있답니다.
포은 정몽주는 충숙왕 12월 아버지 정운관 (鄭云瓘)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 태어낫다.
인종과 의종대에걸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역임한 정습명의 후손입니다. 정습명 이후 후손들은
대대로 오천과 영천에서 거주하였으나 무신정권에서
몽고지배로 이어지는 동안 중앙에 진출한 사람이 없던
평범한 사족이였다고 하고 포은 정몽주의 학문은 사승
관계없이 독학으로 자득한것이여서 이점에서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볼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사서에 통하였지만 대학, 중용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심취하고 있는 일면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포은은 사장지학보다 심성지학인 "사서"에 주력하였
는데 그의 유학적 소양이 정밀하고 깊었음을 짐작하게
하고 유학적 소양은 경학을 근본으로하여 이루어져
이때 경학은 성리학이된다고 합니다.
(포은과삼봉의 철학사상에서 )...
딸들에게 설명을 세세히 해주고
절을하고 내려오는 탐방객
입구에 자리한 자연속 카페 유기농 베이커리 solvang